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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수집기/일본다큐

2부 일본 스스로가 바라보는 731부대

1부 돌아가기 


2부 시작합니다

이 다큐를 접하게 된 경위는 제가 오만 잡다한 다큐 덕후라 해외다큐를 구석구석 찾아 보는편입니다 당연히 분야 상관없이 섭렵하는 잡식성 스타일인데요.


그중에서도 무거운 주제는 잘 안 보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이번 731부대 다큐는 일본 스스로 제작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구미가 당기는 영상물이었습니다. 실제로 NHK 다큐멘터리의 위상은 영상퀄리티나 내용 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이죠.


 BBC나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레벨로 평가받습니다. 들어가는 제작비나 취재 기간만 봐도 작게는 수년 많게는 10년 넘게 공들이는 작품도 꽤 있습니다. 






실제 731 부대원 출신 인텨뷰 


당시 14세의 나이로 731 부대원에 입대한 현재 일본에서 살고 있는 전 부대원과의 인터뷰 모습입니다. 처음으로 취재에 응했다고 하네요. 그의 직책은 부대 비행기 정비공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소장품 하나가 취재진한테 공개되는데요 바로 일본의 엘리트 의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여태 보관 중이다가 이번에 공개했다고 합니다.


바로 731부대 전우회가 정리한 부대원 명단입니다. 의학자들의 출신 대학 및 이름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네요. 적어도 10여 개의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40여명의 연구자들이 차출되었다고 합니다. 교토대학이 제일 많고 그다음은 동경대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의 학자들의 이름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학과 군부대간의 돈거래

NHK에서 취재에 들어가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사실 몇 개가 밝혀졌는데요 그 내용인즉슨 당시에 군부대에 교토 대학 출신자가 11명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토대학과의 특별한 관계를 알아본 결과 중요한 문서가 이 대학의 도서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문서에는 대학과 731부대와의  돈거래가 오간 사실이 적혀져 있었던 겁니다. 세균 연구의 대가로 지금 돈으로 500만엔 (우리 돈 5천만원) 가까운 돈을 연구자 개인에게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그 배경에는 당시에 교토대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의학부장 "토다 쇼우 조" 가 있었고 그는 고액의 연구비를 지원받기로 하고 그 대가로 제자들을 부대로 차출 보냈던 겁니다. 지원받은 금액이 총 2억 500만 엔에 다다른다고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토다 쇼우 조"란 인물이 731부대와 깊은 관계를 맺은 결정적인 사건이 1931년 만주 사변이었습니다.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그 지역을 장악하고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정권을 찬탈했던 겁니다. 이어서 만주에 일본군 병원이 세워지고 본토에서 그 병원으로 의사를 공급한 인물이 "토다 쇼우 조" 입니다. 


당시 "토다"는 국가가 만주 진출에 힘쓰는 동안 의사도 여기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을 내세운 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사고의 소유자를 731부대의 부대장인 "이시히 히로"가 알아본 것이죠



▼이시히 또한 경대 의대 출신이었습니다. 이시히의 지도교수와 토다와는 절친 이었기에 그렇게 결탁하기에는 충분한 고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731부대의 연간 예산이 지금 액으로 300억 엔 정도 였으니 돈으로 매수하기에 충분했던 겁니다


동경대 출신의 의사들이 그다음으로 많았는데 이에 대해 NHK 취재진은 동경대에 취재를 요구했고 돌아온 대답은 이랬습니다 "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는 없었다"고 딱 잘라 답변을 했다고 합니다. 끈질긴 취재와 조사 끝에 당시 동경대 총장과 이시히간에 거래가 오갔던 증거를 찾아냈습니다. 


총장의 유족에게 얻은 그의 일기에서 본인이 직접 731부대 견학을 다녀온 사실을 적어놓았던 겁니다. 그 내용에는 이시히 부대장으로부터 환대를 잘 받았다는 내용이 상세히 적혀져 있었던 겁니다 아래 사진은 동경대 학회사진에 이시히가 가운데 있는 모습입니다



세균전을 위한 폭탄제조 

세균전을 위해 폭탄에 세균을 채워 넣어 실험을 했습니다. 설계도까지 상세히 나와 있네요
대량살상과 감염을 목적으로 세균폭탄을 연구하기도 했고 실제로 다큐에서 음성 녹음 파일을 들려주는데 증인이 말하길 1회 폭탄실험에 10명 이상의 죄수를 사용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험은 국제금지조항을 무시한 채 연구는 계속 진행되었고 마침내 1940년에 들어서는 세균 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비행기에서 저공비행으로 여러 도시에 3회 이상 세균을 살포하면서 민간인까지 감염을 목표로 자행했다고 생생히 육성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뒤에는 일본의 여론조작이 있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중국이 의외로 결렬하게 항전하는 바람에 일본군의 희생이 커지고 있을 무렵 당시 일본 본토의 신문과 미디어에서는 일본군의 엄청난 희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합니다. 일본군에게 대항하는 중국 민간인을 "비적"으로 몰고 악감정을 갖도록 여론을 몰고 갑니다. 

이에 여론을 등에 업은 일본군부는 비적을 잡아 가두기 시작했고 수천 명의 중국인이 죄없이 수용소에 끌려왔습니다. 일본 여론은 점점 더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고 이에 명분을 얻은 731부대는 살아있는 죄수들을 마루타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증거는 공식 문서에 남아 있습니다



마루타 실험에 대한 731 연구진의 태도

실험문서에는 자세한 실험방법이 서술되어 있는데 "죽은 사람은 실험대상에서 제외한다"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염색체의 상태가 현저하게 약화하기 때문에 실험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모든 생체 실험은 살아 있는 상태로 진행해야 한다 실험대상인 "비적"은 어차피 사형수이기 때문에 실험 재료로 이용하는 게 최적의 방안이다


731부대의 철수

1945년 전쟁이 종식되기 직전, 부대는 증거 인멸을 위해 모든 죄수를 사살하고 실험했던 시설을 철저하게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실험을 자행했던 의사와 연구진은 일본으로 귀국 조처됩니다 부대의 존재뿐 아니라 모든 실험내용까지 함구하는 조건으로 그들은 일본 사회에 복귀합니다

각 대학으로 돌아간 연구진들은 대부분 진급되었고 이후에 교수 또는 학계 권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에도 양심선언 한 연구진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에 시체처리를 맡은 한 병사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물에 물을 다 퍼내고 시체를 넣고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러 처리했다고 합니다. 

상부 명령에 의한 것이었지만 지금까지도 그 모습에 고통받는다고 인터뷰하네요
종식후에 미국은 모든 실험한 데이터와 연구자료를 제공받는 대신에 부대원들에 대한 책임을 안묻는걸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NHK 제작진들의 의견

다큐 말미에 제작진들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만행의 선을 넘은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재판에서 피고인으로 나선 에 한 연구진이 흐느끼면서 자기가 한 짓에 대해 후회한다는 말을 남깁니다. 이 음성을 다큐멘터리 마지막에 담고 다큐멘터리는  끝이 납니다

마치며

일본 스스로 자신들의 만행을 드러냈다는 데는 의미가 있는 영상이었습니다. 다만 제작진의 의도로 보이는데 잔인한 장면을 거의 다 빼고 증언 음성과 증언자들의 표정, 떨리는 목소리 위주로 편집된 걸로 볼때 이는 사실을 직접 드러내기보다는  다소 감성적으로 접근을 시도하지 않았나 싶네요. 이 부분은 아쉽습니다